[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 가사문학의 본거지인 담양에는 많은 정자들이 있다. 그 중에 오늘은 식영정, 취가정, 독수정을 돌아본다. 식영정은 지난번 기사에 본 송강정 환벽당과 함께 송강 정철이 거하면서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등을 지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본래 식영정은 김성원이 스승인 석천 임억령을 위하여 지은 정자로, 식영정이란 그림자도 쉬어가는 정자라는 뜻이다. 식영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작은 정자로 한칸 온돌방 하나가 있고, 나머지 3칸은 마루가 깔린 대청이다. 식영정의 아래에는 서하당이 있는데 이는김성원이 자신의 호인 '서하당'을 건물의 이름으로 붙인 것이고, 그 옆에는 부용대가 있는데 부용대 앞에는 연꽃을 심은 연못이 있어 여름이면 그 연못에 부용대가 비쳐 정자는 작지만 연못에 다리를 뻗고 있는 모습이 거울처럼비추어 선계를 보는 듯 아름답다. 김성원은 정철과 같은 시대 사람으로 당시 이곳에 머물던 4명의 문인을 천상의 신선처럼식영정 4선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임억령, 김성원, 고경명, 정철이다. 이들은 이곳 성산의 경치좋은 곳 20곳을 택하여 각각 20수씩 시를 지었는데 이를 모두 합하면 8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무등산을 낀 광주, 담양에는 호수와 계곡의 주변에소쇄원을 비롯한 많은 원림과 정자가 있다. 그 가운데 오늘은 면앙정, 송강정, 환벽당을 둘러본다. 정자는 한국인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건축물이며, 자연속에묻혀 살고자 한 한국인의 대표적조경의 기법이기도 하였다. 강, 계곡,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좋은 곳에는 어디에나 정자를 짓고, 무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지냈으며, 이곳 담양에는 차갑고 추운 가을, 겨울에도 이용하기 위하여 정자에는 한칸온돌방도 들여서 사계절 선비들이 만나서 소통하는쉼터로 삼았다. 정자는 대부분 경치가 좋은 아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짓되 정면은 주로 3칸으로 지었으며, 지붕의 형태는 팔작지붕으로 날아갈듯하게 날렵한멋을 내었다. 정자에 오르면 어디나많은 시인들이 다녀가면서 자신이 정자에서 느낀 시를 썼고, 그 중에 좋은 시들은 널판에조각으로 새겨서 정자의 대들보주변에 붙였다. 많은 시가 붙은 정자는 그만큼 훌륭한 시인들이 거쳐갔다는 것을 뜻한다. 면앙정은 송순이 지은 정자로, 송순은 1493~ 1582를 살았는데 나이가90세까지 살아 당시로는매우 드물게 장수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소쇄원은 전남 담양군에 있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원림이다. 소쇄원에는 계곡옆에 경사진 곳에 돌로 축대를 쌓아 대지를 만들고, 그 대지위에 집 3채를 지었고, 주변에는 여러 인공시설을 하였다. 서쪽이 언덕으로 동향한 대지에는 기와집인광풍각과 제월당 그리고 초가정인 대풍대가 있으며, 기와집 주변에는 자연석 막돌담장을 두르고 그 위에는 기와를 이어 인공구조물을 만들었다. 그런데 소쇄원은 사람이 자기의 의도에 맞도록 축대도 쌓고 담장도 치고, 연못도 만들고 물길도 조정하면서 인공적으로 가꾸었으나, 그 인공적인 맛 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맛이 느껴지는 것이 특징으로, 한국인들의 자연에 대한 심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연유로 한국인뿐 아니라 외국에도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정원을 느끼고자 찾는 가장 유명한 명소가 되었다. 자연에 인공을 더하였으나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인공이 자연속에 동화되어버리는 느낌을 주고 있으며, 그런 느낌은 한국의 옛 건축물들에서 많이느낄 수 있는 조경기법으로 세계인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자연을 사람의 입맛에 맞도록 만들는 조경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속에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한국 근대사의 큰 인물로일제강점기와 해방 후를 치열하게 살다 암살의 흉탄에 생을 마감한고하(古下) 송진우선생의 생가를 찾았다. 선생의 생가는 전남 담양군 금성면 대곡리에 있는 한국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농촌 집이다. 집의 구성은 따뜻한 지방의 가옥 모습으로 각각 일자(一字) 형태로문간채, 안채, 그리고 곳간채로 구성되었다. 이농가는조선조 양반가의 집처럼 번듯한 기와집도 아니었고, 또 웬만한 양반가의 집처럼 남자들의 공간인사랑채가 별도로 구획되어 있지도 않았다. 이 집은 담양지역 양지바른 경사진 언덕에 돌로 축대를 쌓아 평평한 대지를 만들고, 그 대지 위에 터를 다듬어 집을 지은 것이다. 이 집은송진우선생이한국에서 교육 언론에 종사하면서독립운동에 공헌한 중요인물로 인정되어,생가터에 다시 복원한 집이다. 그런데 선생이 살았던 당시의 집이 아니어서 한편으로는아쉬웠고 또 한편으로는이렇게라도 복원되어 다행스러웠다. 이 집은 한말 의병장 성재 기삼연(1851~1908)이 1896년 전남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1902년 체포되었고 이후감옥을 탈출하여 은거했던 집이기도 하다.기삼연은 고하 송진우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산 개심사는 상왕산 서북쪽자락에 있다. 그런데 상왕산의 서남쪽 계곡에는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다. 서산마애삼존불 근처는 보원마을로 이곳은 1970년대 까지도 농촌마을과목장으로 소떼가 풀을 뜯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이 문화재지표조사결과 절터로 판단되어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거쳐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고, 이곳이 고려시대 크게 융성했던 보원사터임이 밝혀졌다. 보원사터는 약 3만평에 이르는 넓은 지역으로, 발굴결과 큰 석조(물을 담은 큰 돌그릇)은 보물 102호, 당간지주는 보물 103호, 오층석탑은 보물 104호, 법인국사보승탑은 보물 105호,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철불좌상(문화재지정을 아직 못받음) 그리고 수많은 소불들 등 유물들이 발굴되었다. 현재 보원사터에는 절의 입구에 높이 서있던 당간을 받치던 당간지주와 오층석탑 법인국사보승탑과 탑비가 남아 있으며, 이 석물들은 다행히도 땅속에 잘 묻혀 있어서 거의 훼손되지 않고 온전한 모습이다. 땅위에 노출되었더라면 손상되었을 것인데, 흙속에 묻혀있었던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은 박물관에 이전되어 있는 보원사터 철불좌상은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서산 마애삼존불은 백제시대 언젠가조성된 불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 전해지고 있는 백제불상 가운데가장 아름다운 마애불상으로 넉넉한 백제인의 마음씨를 잘 표현한 작품으로도알려져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은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상왕산계곡 가파른절벽에 새겨진불상으로 운산면에 있다고 하여 '운산마애석불'이라고도 한다. 본래 백제시대 부르던 이름은 알 수 없고, 서산군에 있다고 하여 서산마애삼존불로 불리워지고 있다. 현재는공식명칭이 '용현리마애삼존불'로국보 제84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이곳은 당시 백제의 서울이었던 부여, 공주, 익산에서서해 뱃길 포구인태안이나 당진으로 가는 길목으로 가야산을 넘어오는 지름길이다. 가야산 근처에는 많은 큰 절들이 있었는데,조선 후기 까지도 가야산건너편에가야사라는 큰 절이 있었고, 상왕산 서산마애삼존불 근처에는 보원사라는 큰절도 있었다. 또 서산마애삼존불이 있는 상왕산 건너에는 서산 상왕산개심사도 있다. 그러나 이 절들은흥선대원군이 유명 풍수지관의 말에 따라 자기 자손에서 2대 천자를 배출하기 위하여 빼앗기로 마음먹은 뒤, 가야사의수많은 전각들을완전히 불태워 폐사하고, 그곳에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석등은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등 절의 중요한 건축물이나, 야외에 세워진불상 앞에 불을 밝히기 위하여 세운 조형물이다. 석등은 그 뜻과 같이 불을 밝히는 돌로 만든 조형물이지만 단순히 어두운 밤에 불을 밝히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부처님을 모신 전각 앞에서 중생계의 무지를부처님의 진리로 밝힌다는 의미가 있으며, 또 등불이란 등잔 속에 기름으로 자신의 몸을 태워 불을 밝힘으로 자기 안에 있는 깨달음의 불성을 보이고자 하는 큰 뜻도 있다. 곧 불을 밝힌다는 것은 자신을 태워서 세상을 밝힌다는 의미도 포함한 것으로 타인을 위해 자신의 바른 행동으로 보살행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원대한 대승불교의 보살행을석등이라는 조형물에 표현하고자 하였기에, 한국의 석등은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매우 정교하고다양한 모습으로 발달해왔다.이런 석등은 한국불교만의 독특한 불교조형물로 시대를 거치면서 발달하여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나, 대승불교가 활짝 피어난 중국이나, 한국불교가 전수된 일본과 달리 매우 독특한 형상으로 다양하게 발달되어왔다. 그런데 일반적인 한국의 석등과는 너무도 다른 흥륜사 석등이 있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흥륜사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주 동천동 소금강산에는 옛 굴불사터 사면석불이 있다. 사면석불이란 네모진 바위의 각 면에 불상을 새겼다는 것으로 자연석 육면체 바위에 각각의 방위별로 그에 합당한 의미가 있는 불상을 새긴 것이다. 이 사면석불의 유래는 《삼국유사》에 자세히 기록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재위742년~765년)이 현재 굴불사터 사면석불 바로 위쪽에 있는 백률사(栢栗寺)로 가기 위해 이곳에 이르렀는데, 땅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임금이 소리나는 곳을 파보게 하였더니 큰 바위가 나왔다. 파올린 바위에 왕명에 따라 사면에 석불상을 새기고 그곳에 절을 지어 굴불사(掘佛寺)라고 하였다. 사면석불을 새긴 까닭은 이곳을 중심으로동서남북 모두 불국토임을 표현한 것이다. 이 사면석불은 서쪽에는 아미타삼존불상을 새겼다. 삼존불은 서방정토의 아미타불과 협시불로 보이는데, 본존불과 관세음보살은 비교적 온전한 모습이나 아미타불 오른쪽에 있는 보살은 머리부분이 없어져 무척이나 아쉬웠다. 동쪽에는결가부좌를 한 불상이 손바닥에 보주를 들고 있는 모습인데, 이는 약사불로 현생 중생들의 온갖 병고를 치료해준다는 의미가 있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 창건한 절로 고승 원효대사와 자장율사가 거쳐간 절이다. 원효대사는분황사에서 출가하였으며, 화엄사상을 깊이 체득하여 난해하기 이를데 없는화엄경을 해설한 화엄경소, 법신 비로자나불을 믿고 자신의 죄를 참회하면 자신과 국가가 사천왕 등의 보호를 받 다는 금광명경을 해설한 금광명경소 등 많은 책을 지었다. 원효스님이 열반에 든 뒤에는 그의 아들인 설총(한국 유학자 중 성균관 문묘에 오른 최초의 인물)이 원효대사의 조각상을 만들어 모셔두고 설총이 죽을 때까지이곳 분황사에서아버지인 원효스님을 공양하였다고 한다. 원효대사의 조상은 고려 후기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스님이 있을 때까지 있었다고 한다. 분황사의 기록에 따르면, 분황사 금당전각의 벽에는 신라시대 신묘한 화가였던 솔거가 그린 관세음보살도가 있었다고 전하며, 경덕왕 14년(755년)에는 무게 30만근에 이르는 거대한 약사여래입상도 봉안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번창하던 분황사는 고려 후기 몽골의 침략으로 황룡사와 함께 모두 소실되고 말았다. 과거 분황사의 흔적은 경내를 둘러싼담장 아래 널리 펼쳐진 주춧돌과 각종 석조 유물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경주의 동쪽 바닷가에는 감포가 있다.감포(感浦)란 감은사(感恩寺)가 있는 마을의 포구라는 뜻이다. 이곳은 죽어서 동해의 용이 되어 신라를 지켜주겠다고 서원한 통일신라 문무대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있는 근처이기도 하다. 이곳 감포에서 감은사와 대왕암(문무왕의 수중릉)까지는 8km 정도이다. 그런데감포 해안은 지하의 뜨거운 용암이 지각을 뚫고 솟아올라 그대로 굳은 검은 현무암지대다. 지구의 표면 안쪽에는 끊임없이뜨거운 용암이끓고 있는데, 용암이지구의 약한 곳을 뚫고 나와 뜨거운 용암이굳어 바위가 된 것이다. 이는 용광로의 쇳물이 땅에 쏟아지면 흐르다 그대로 굳은 듯그 모양이 거칠기 그지 없다. 수 천 년 전분출한 용암이 바다속 차가운 물에 노출되어 갑자기 굳은 바위가 된 감포앞바다의 현무암지대는 오랜 세월동안 거친 파도에 노출되어 파도와싸웠지만, 지금도 그 모습이 처음 분출했던 현무암처럼 여전히 거칠다. 겨울이 한창인 1월 말, 그 날 따라 일년에 몇 번 없다는 거친 파도가 몰려오는 날이었다.다행히 바람은 거세지 않고, 파도만 높은데 몰려오는 파도가 마치 바다의 용트림 처럼 거칠었고,현무암과 부딪혀